"가잘 때 가야지"
천화대 뒷풀이에서 봉정암 이야기가 나왔다.
경애 누나가 "몇년전 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왔는데, 가는 길도 편하고 너무 좋더라~ 우리도 한번 가자" 라고 운을 띄웠다.
단풍이 들 무렵인 10월 말에 가기로 하고, 동철이 형님이 일을 뺄 수 있는 26일에 가기로 잠정 합의를 하였다.
길이 편하다는 얘기에 애들도 다 데려가는 걸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인터넷 후기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길이 길다.
욕심인 거 같아, 애들은 놔두고 우리끼리 가는 걸로 생각을 했다.
올해 두번째 설악산 원정을 준비하며, 경애 누나랑 일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나는 다녀와서, 안 갈껀데~"
수화기 넘어 경애 누나의 이야기에 당황;;;;; 아내도 나도 같이 가는 걸로 알았고, 덕용.점례 형누나에게 물어봐도 같이 가는 줄 알았단다. 내 기억이 틀렸나 하기에는 모두의 기억이 같아, "다녀와서 안가고 싶나 보다" 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동철이 형님도 안 가는 줄 알고 덕용이 행님이 괜찮다는 날짜로 10월 5일로 등산일을 바꿨다.
가는 김에 대청봉도 다녀오자는 얘기에 (4명 다 대청봉은 안가봄)
소청이나 봉정암에서 자기로 하였는데, 소청은 10월은 사전 예약이라 안되고 봉정암도 10월 주말에는 자리가 없다고 한다.
날짜를 10월 4일로 바꾸고 각자 휴가를 내기로 하였다.
진주에서 3시쯤 출발하여 용대리에 9시쯤 도착하고 아침을 먹고 산행을 시작하는 걸로 하였다.
03:00 진주 출발 09:30 용대리 도착 아침식사 11:00 백담사 도착 (버스이용) 산행시작 17:00 봉정암 도착 뒷날 대청봉 일출 오색이나 원점회귀로 하산 |
진주에서 안동, 홍천을 거쳐 내설악으로 떠난다.
내가 강원도 초입까지 운전을 하고, 그 뒤는 덕용행님이 운전을 했다.
용대리의 황태해장국 집에서 아점을 먹기로 하였다.
이 집이 좋을까? 저 집이 좋을까? 고민을 하다 방송에 몇번 소개되었다는, 차가 많이 서있던 집을 골랐는데
황태해장국 맛은 그냥 그랬다. 그냥 물에다가 황태 끓인 맛.
다들 별로라면서도, 그래도 반찬은 괜찮다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데, 금요일임에도 차가 많다.
올라갈 때는 왼쪽, 내려올 때는 오른쪽이 뷰가 좋단다.
점례 누나의 정보에 따라, 왼쪽에 착석.
계곡을 바라보며 편히 백담사로 향한다.
우리 세대에겐 전두환이 칩거한 것으로 유명한 백담사.
만해 한용운이 머물며 많은 저서를 남겼고, 여러번 불타고 중창한 역사가 깊은 절이다.
백담사를 지나 산길을 조금 오르면
자연의 일부인양 돌로 외벽 마무리를 한 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본격적인 봉정암 순례길이 시작된다.
산객들에게 닳고 닳은 설악산 다람쥐들은 겁도 없다.
그만큼 설악산 유독 다람쥐들이 많고, 사람이 있음에도 달아나지를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온다 할까?
봉정암 순례길은 계곡을 따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리산과 달리 거의 계곡에 붙어 가다 보니 산속임에도 보이는 풍광이 다르다.
계곡을 따라, 풍경에 마음이 젖다보면 영시암이 나온다.
영시암에서 절을 올리고 잠시 쉬어간다.
집에서 가져온 과일과 간식
주차장에서 사온 감자떡
영시암에서 베푸시는 커피로
진수성찬이다.
녹색과 파란의 언저리에 있는 깨끗한 물
계곡을 따라 오르다보면 만나는
드문드문 있는 조금 이른 단풍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 한점 없는 더 없이 좋은 날씨
연심 감탄을 하며 한참을 오르다
"이게 설악이야" 라며 뽐내듯 병풍같이 펼쳐진 바위들을 보며 입이 쩌억 벌어진다.
앞으로 봤다, 뒤를 봤다, 옆으로 봤다.
다들 처음인 내설악의 위용에 연신 고개를 돌린다.
산 마다 유명한 깔딱이 있다.
지리산에 화대 종주의 서막을 알리는 코재가 있다면, 설악산 봉정암에는 해탈고개가 있다.
됨비알이지만, 욕심부리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오르다보면
몸은 한없이 뜨거워지고, 이마는 이를 증명한 듯 땀이 송글 맺힌다.
쉬어가는 이, 한번에 오르는 이
다 각자의 걸음으로 오르면
해탈 고개도 끝이다.
해탈고개 뒤에는 큰 어려움은 없지만, 오랜만의 산행에 다리가 무거워진다.
다리에 살짝 살짝 근육통이 올 때 쯤
오늘의 종착지 봉정암이다.
절을 대충 둘러보고, 종무소에 우리가 왔노라 신고 아닌 접수를 한다.
어찌할까 얘기를 나누다, 일단 더 길을 오르기로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다리가 멈춘다. 멈췄다 갔다를 반복하다 소청 대피소에 도착을 하는데
대청봉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하다. 대청봉은 내일로 미루고 경애누나가 극찬한 봉정암 미역국을 선택하기로 하는데
행님,누나의 핀잔이 귀에 따다다다다다닥 박힌다.
"몸 상태가 안 좋으면! 무리를 하지 말고! 욕심을 내지말고! 내일 대청봉 가자고 하기만 해바라!"
귀는 두개다. 걱정해주는 마음만 필터링 하고, 나머지는 다른 귀로 흘려보내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절경이다. 내설악 대표 뷰 포인트 소청 답다.
그래도 언제 다시 올까봐~ 단체사진!
봉정암으로 다시 내려오니 생각보다 거리가 있다.
유명한 봉정암 미역국.
소문과 달리, 시쳇말로 개미가 없다.
물에 미역 끓인 맛. 간이 전혀 없어 김치 맛으로 먹는다.
내 입맛에만 그런가 했더니, 다른 분들도 먹느니 마느니 한다. 그래도 베풀어 주시는 마음에 감사를 표하며 밥 한톨 까지 안남기고 먹었다.
투덜이 스머프가 된 덕용이 행님은 두고
우리는 사리탑을 보고 오기로 했다.
소박한 탑이 바위를 기단삼아 절벽위에 서 있다.
은은한 조명이 더해져 신비로움을 더한다.
순례를 오신 분들은 절을 하고, 우리도 절을 하려하다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내가 위에 올라가서 풍경을 보고 괜찮으면 얘기하겠다며 오른다.
오르자마자
"올라오세요~~"
푸름이 짙음을 더한 여백에 해가 미련처럼 남긴 붉음이
어둠속으로 잊혀가던 산새를 조금은 비추어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더니, 소청에서 내려오면서 적멸보궁을 둘러볼 때 보이지 않던 탑이
이제는 너무도 선명하다.
인생 처음으로 저녁 예불도 해보고, 신묘한 밤이다.
봉정암의 하룻밤은 말그대로 철야기도다.
성인 남자 기준으로 무릎을 굽히고 옆으로 누워도 좁다. 그래도 오늘은 자리 여유가 있는지 한칸씩 띄워서 자리를 배정해주셨다.
그래도 좁기는 마찬가지.
내 머리 맡에 있는 다른 사람의 발냄새를 향수 삼아 고행의 길로
깨다 자다를 반복
3시즈음을 넘어서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혼자 방을 빠져나온다.
혼자서 대청봉 갔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가자고 하면 또 가야지 라를 생각에
다시 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도록 짐을 나눠 정리하여 절 구석에 보관해두었다.
주섬주섬 4시 즈음 절을 나서는데, 귀신같게도 아내한테서 전화가 온다.
"같이 가, 점례 언니한테도 물어볼께~"
천천히 가다가 별 사진 찍으며 기다린다고 하고
어둠을 지나 동해 쪽 도시의 불을 미련삼아 길을 잇는다.
10여분 지나서 출발 한다는 기약이 있었다. 소청을 지나서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별 사진을 찍었다.
하늘에는 자연의 빛
발 아래에는 사람의 빛
그 가운데 내가 있다.
셀후를 찍고 있으니 밑에서 헤드랜턴 가느다란 빛이 보인다.
아내도 한장, 누나도 한장
중청 대피소를 지나 이제 기운이 잦아진 능선을 따라 오르니
대청봉 넘어로 붉은 기운이 올라온다.
어제 안 올라온다던 덕용이 행님도 출발을 했다는 기약이 있고
얼마남지 않은 일출을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오색에서 올라온 사람들도 인산인해다.
열로 얼굴이 붉어진 사람, 하나도 안 힘들다며 너털 웃음을 짓는 사람
반바지 차림의 사람, 패딩을 입는 사람
가지각색이다.
먼저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길다란 줄 제일 끝으로 간다.
줄은 점점 줄어들다가, 해가 뜨기 막 전에 우리의 차례가 온다.
바삐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지리산 천왕봉 사진은 이제는 챙겨 찍지는 않지만, 처음 올라온 설악산 대청봉 사진을 그냥 지나 칠수가 없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익숙함 보다는 처음 아니던가?
정상석 뒤로 하늘이 더 없이 붉게 타오른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이어지고, 동해바다 위로 해가 떠오른다.
3대가 덕을 쌓아야지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천왕봉의 일출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설악의 일출이다.
일행에게 "날씨요정"의 공덕을 강요하며 정상을 빗겨서 덕용행님을 기다렸다.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태양은
골짜기 구석구석 골고루 빛을 내린다.
빛은
깊은 골은 조금은 늦게, 낮은 골은 조금은 빠르게
조화롭게 골자기를 채워나가다
차가운 바위를 만나 부서지듯 붉은 빛을 만든다.
대청봉의 그늘이 중봉위에 위엄처럼 내릴 무렵
아래에서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점례 누나의 푸념같은 핀잔의 혼잣말이 이어지고
장군봉, 천화대에도 빛이 가득할 때 덕용이 행님은 대청봉 정상에 섰다.
한참을 줄 서서 사진을 찍은 우리보다 더 좋은 각도로 사진을 찍고
다시 네명의 산행을 시작한다.
중청 대피소는 공사로 바쁘다.
헬기가 부지런하게 짐을 나르고, 인부들은 등산객들을 불러 세운다.
대피소 운영도 이제 안한다고 하는데, 무슨 시설은 또 좋게 지을라고 하는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내려오면
내려다 보이던 바위들도 이제 다시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다.
그럼 봉정암이다.
시간이 늦어 봉정암 아침 미역국 공양은 다행히(?) 못 먹어
아점으로 챙겨왔던 비화식 행동식을 먹기로 했다.
17~8년전쯤 지리산 종주를 하며 처음 먹어보았던(군대 전투식량 제외)
뜨거운 물을 부어서 10여분 뒤에 먹을 수 있었던 비빔밥에 비해 너무도 극적인 발전이다.
찬물을 부으면 물이 끓고, 진짜 사발면에 밥 말아 먹는 맛.
산 위에서의 한끼로 더할 나위 없다.
봉정암은 좋은 날에 다시 찾기로 하고
백담사로 길을 잇는다.
올라올 때 봤던 익숙한 풍경도 있고
처음 본 듯 새로운 풍경도 있다.
같은 길을 감에도, 보이는 것이 느끼는 것이 다르다.
좋은 길
좋은 날씨
좋은 사람
더할 나위 없다.
'하고있는 > 홍산악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악산 천화대 (1) | 2024.10.29 |
---|---|
다섯명의 첫 해외여행, 베트남 다낭 #6 다섯째날 (2) | 2023.10.19 |
[SH-PRJ] 6회차 피날레 - 천등산 어느등반가의 꿈 (0) | 2022.11.01 |
[SH-PRJ] 5회차 - 대둔산 동지길 (0) | 2022.11.01 |
[SH-PRJ] 4회차 - 황매산 전더미의 메아리 (0) | 2022.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