會者定離去者必返
(회자정리거자필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는, 좋아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있다.
살면서 다면적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나는 어렸을 때 부터 관계에 그렇게 억매이지는 않았다.
누나들은 친구를 너무 가린다 라고 하기도 했고, 대학교 때는 쿨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할만큼 인연이라는 것을 그렇게 부여잡으려 하지는 않았던 거 같다. 따라서 어떤 모임에 속하고 거기서 만족감을 얻는 건 나하고는 거리가 먼 일이였다.
설악산 천화대
10년전 암벽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듣게된 천화대의 명성은 난공불락의 성지 같았다.
"그 좋은데를 안 가봤나~?" 며 선답을 한 선배님들의 놀림같은 자랑도 꽤 들었다.
올해 초 클럽 내 좌파 불온세력 형, 누나들과의 얘기 중에 천화대를 가자라는 얘기가 있었다.
다들 흘려 들은 걸 5월즈음 천화대 예약 방법들을 찾아보다가 진짜로 추진을 하게 되었다.
1. 좋은 곳을 가보자 -> 천화대
2. 우리도 가보자 -> 남 신경쓰지 말고
처음에는 1박 2일 범봉까지를 얘기하다, 너무 빡센 등반 보다는 즐길 수 있는 등반을 추구하기로 하고
당일 등반 희야봉까지를 목표로 하되, 시간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준비 및 예약
카톡에서 계속 의견을 나누며 등반에 대한 준비를 했다. 6명이서 각자 나름의 역할을 맡아 추진하였고, 나는 내 맘대로 총무를 맡았다.
8월 2일~4일 일정으로 등반은 3일에 하기로 하였다.
천화대 등반 신고
설악산 등 국립공원의 암벽등반은 예전의 팩스 신청 방식에서 홈페이지를 이용한 신청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천화대도 사전 등록 방식이 아닌, 바로 신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예전의 아날로그적 낭만은 좀 줄긴 했지만, 신청 방식이 간편하고 명확해졌다.
설악동 야영장 예약
비용을 줄이자는 나의 의견으로 야영장을 예약했다.
설악동 야영장은 1개 사이트에 제한 인원은 따로 없어, 2개 사이트를 예약하고 각자가 2인용 텐트를 가져오기로 했다.
사전확인 등
유튜버 유성(링크)님에게 필요한 캠 사이즈를 물어보고 공동장비를 구성하였다.
설악산 근처에 24시 식당을 찾아보았고, 대략의 일정을 짰다.
10년전 등반교실 이후 애셋의 출산하면서 암벽등반을 거의 하지 못한 (첫째 낳고 릿지 한번 감) 아내를 위해
집에서 시스템 훈련과 체력훈련을 하였다.
8자 매듭, 하강 방법 을 중점적으로 해 매달린 상태에서도 자기 안전은 자기가 챙길 수 있게 하였다.
애들을 재우고 밤에 4~5키로 정도를 뛰었다.
원정 1일차
설악산 가는데 무슨 원정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애 셋이 있는 우리에겐 애들을 때놓고 산을 간다는 건 처음 있는 일 이다.
아내는 미리 애들을 데리고 포항 처가에 갔다.
금요일 17:30 진주에서 세명이 출발 했다. 18:30 함안에서 두명을 싣고 포항으로 나섰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준비해간 저녁을 먹고 9시 10분쯤 포항 영일대 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내는 우는 애들을 두고 온다고 혼이 났는지, 우리가 영일대 구경을 한참 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로 왔다.
자유부인급 6인의 외도같은 등반, 출정이 이제 시작되었다.
포항에서 속초까지는 7번 국도를 따라 올랐는데, 바닷가를 따라 오르는 7번 국도도 경치는 여전한데
도로는 많이 정비가 되었다.
원정 2일차 (등반 당일)
내가 잠깐 잠을 잔 사이 무슨 조화였는지 도착 예정 시간을 한시간 정도 크게 당겨 속초에 다다랐다.
강원도의 시원함을 느껴보려고 창문을 잠깐 내려보지만, 후덥한 공기는 여름 한 가운데 임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24시 하는 식당을 찾아, 속초 먹거리단지로 이동 해장국으로 매우 이른 아침을 먹었다.
배를 채우고 다시 운전자를 바꿔 어둠을 뚫고 설악동을 달린다.
2시 10분쯤, 이른 시간 임에도 부지런한 산객들로 붐비는 주차장에 도착해 등반 짐을 정리한다.
주차장 관리자분에게 단체 사진을 부탁드리고 어둠 속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몇년 전 신문 기사 처럼 새벽 일찍 부터 칼같이 시작하던 신흥사 입장료 징수는 없어졌다.
부처님의 땅에 자비가 내렸다. 소공원을 지나 랜턴으로 길을 내며 곰과 철불을 지나 다리를 건너 비선대 쪽으로 향한다.
밤, 설안의 품안임에도 공기가 무겁다. 땀이 흘러내릴 때 쯤 비선대 계단 앞에 닿는다. 가파진 숨을 뱉으며 뒤를 돌아보니 어두워 삼형제 봉의 형체가 흐릿하다.
출입금지 팻말을 넘어 길을 이어간다. 바위들이 보이고 긴가민가, 1피치를 지나왔나 헷갈려 하며 장비를 착용한다. 쉬운 길을 어영부영 동철이 형님이 줄을 깔고 가는데, 사진에서 보던 1피치 침니가 나온다.
이제 천화대 들머리에 섰는데 운동 부족인지 벌써 땀이 콸콸콸
니가 한번 해볼래?
동철 형님의 권유
등반도 운동도 안한지 꽤 지난, 말 그대로의 장롱면허. 오늘 아니면 언제 설악산 줄 걸어보겠냐는 생각에 고고싱
1피치는 작은 침니 형태로 많은 후기와는 달리 침니가 젖어있지는 않아 첫 볼트를 지난 후 등으로 바위를 밀면서 가면 쉽게 갈 수 있다. 빡빡 머리 상태라 터진 땀이 얼굴로 콸콸 쏟아지고, 안경은 흘러 내리고 헬멧은 뒤로 젖혀진다. 아~
세컨으로 덕용이 행님이 올라가고 세번째로 아내가 올라온다. 아내랑 릿지를 해본 것도 10년 전 졸업 등반 말고는 없으니, 아내의 후등자 확보를 봐주는 것도 처음이다. 20년 정도를 함께 했음에도 안해 본 것이 많구나.
아내는 진클 23기 친송받던 모습 그대로 잘 올라온다.
처음 가 본 천화대는 바위를 오르는 것 보다 걷는 것이 더 많았다. 더위가 절정인 8월 첫째 주말 치고는 덜 더운 거라고 위안을 삼지만 걸을 수록 몸이 축난다.
2피치도 어렵지는 않다. 계단 형태의 페이스를 올라 인터넷에 후기에 끊어가라는 말이 있길래 언더 크랙 아래에서 한번 끊었다.
어렵지 않은 언더 크랙임에도 말 그대로 쫄았다. 왜 이렇게 운동 안하고 언더크랙을 만나면 쪼는지. 암튼 쫄았다.
캠을 치고 가다가 힘도 빠지고, 캠도 빠져 떨어졌는데, 캠이 손가락을 찍었다. 아프다.
덕용이 행님에게 SOS
광주에서 오신 2명 팀에게 길을 내어드리고, 명실상부 13클라이머가 된 덕용이 행님이 길을 잇는다.
마음을 비우고 다시 붙어보니 쉽다. "내가 가면 어떻고, 남이 가면 어떠리" 라고 생각하지만, 쫄아버린 스스로를 질책 한다.
운동이 부족하고, 자신이 없어질 때 쯤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는 고소공포증. 그리 태어난 것을 어찌하리오.
노란벽까지는 걷다가 하강하다가 잠깐 오르다의 반복이다.
굉장히 오랜만에 하강을 해보는 아내, 며칠동안의 연습이 빛을 발한다.
그렇게 가다보면
왕관봉이 잡힐 듯 노란벽 건너로 보인다.
노란벽에는 앞선 두팀이 오르고 계신데, 중간에 벌집이 있는 모양이다.
내 차례가 되어 벌집 있는 곳을 둘러 좌측으로 트레버스 해서 오르는데
동철이 행님이 프렌드가 있을 꺼라고 회수를 하라고 한다.
다시 돌아가 10분 여를 이 크랙 저 크랙 찾아봐도 프렌드는 안 보인다.
알고보니 다른 팀의 장비였나 보다. 덕분에 체력 -10, -20, -30
물도 떨어지고, 길을 더 잇기에는 시간이 어중간하다 판단하여
왕관봉 안부에서 하산하기로 했다. 인터넷 개념도에 탈출로라고 표시된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길이 희미하지만 중간 중간 자일이 깔려 있으니 믿고 한참을 내려간다.
다들 지치고, 멘탈이 너덜너덜 해질 때 쯤 소중한 계곡을 만난다.
다들 더위를 식히러 물에 뛰어 들고, 뜨뜨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였다.
살 거 같다.
여기서 부터는 길이 좀 더 명확해진다. 계곡을 따라 쭈욱 내려가다보면
새벽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였던 길들이 또렷해져있다.
다들 몸은 지쳤지만, 마음 속에 뭔가 깊은 무엇인가를 채운 듯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설악동으로 길을 잇는다.
이번 등반을 위해 구입한 아내의 KEEN 릿지화
인터넷 후기는 없지만, 릿지화로 신어도 괜찮은 제품. 아내는 대부분을 이 신발을 신고 등반을 하였다.
여섯명의 첫등반
아내의 거의 10년만의 등반, 첫 설악 등반
여러가지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번 등반은 어떻게 기억될까?
무언가를 채우고, 무언가를 비워낼 수 있는 등반이였으면 한다.
그 무언가가 끈끈함이고
그 무언가가 미움이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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