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보다는 어프로치가 더 힘들다는 농담이 있지만, 나에게는 어프로치보다도 집을 나서는게 더 어렵다.
아내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가라고 하지만,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해야하기에 선뜻 마음을 내기가 힘들다.
우리 가족의 수가 하나씩 늘어나며 나는 자연스레 등반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남의 등반기로 대리만족하는 웹 클라이머가 되었다. 산에서 멀어지다보니 산 아래의 일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그게 가끔씩 가는 등반에까지 영향을 미쳐, 등반의 유쾌함은 추억 속 한장면이 되어가고 있었다.
클럽 카페에 올라온 농도짙은 등반후기를 보며 2015년 처음 바위를 오르던 때를 추억하던 중, 때마침 올라온 평일 야등 번개 공지
"밤에 등반하면 좀 낫겠다"
아내에게 가도되냐 물어보니 언제나 처럼 다녀오라고 한다.
오랜만에 별일 없었던 생일 저녁
애들을 재우다 나도 잠 들어버렸는데 다행히 새벽에 잠이 깨어
부스럭부스럭 배낭을 싼다.
등반 당일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엄청 왔는지, 등반을 어떻게 할지 카톡이 와있다.
자칭타칭 날씨요정인 나, 못 먹어도 GO~
진주에서 2명, 대구에서 1명, 함안에서 1명
출발 시간은 제각기, 각자의 도시에서 하나의 산으로 모인다.
8시쯤 등반 배낭을 챙겨 산속으로 든다.
전더미봉 아래에 처음으로 길이 낫던 2016년 당시의 어프로치 길이였던 너덜을
어스름한 어둠속에 각자의 헤드랜턴 불빛과 앞선 사람의 불빛을 더해 조금씩 고도를 높여나간다.
어제 내린 비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지만
땅속에 있던 습기가 밀려 올라와, 몸 속에 있던 물들을 불러 내린다.
처음으로 동철이 형님 없이 등반을 나선 경애 누나는
어색한지 시작부터 위태위태 너덜 위에서 춤을 춘다.
"앗싸 호랑나비"
20여분의 산길을 끝내고, 이제 바위길을 시작이다.
어둠 속에는 헤드랜턴 불빛, 짤랑짤랑 비너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송모의 썩은 수건 냄새만이 있었다.
준비를 끝낸 우리는
클럽 단톡에 등반을 시작을 알린다.
선등은 송모.
등반도 잘하고, 황매산도 자주 와선지 거침이 없다.
두번째 달래.
등반 욕심도 많고, 등반 중에도 해야할 일을 열심히 찾는
몇번 보지 않았지만, 마음가는 동생이다.
세번째 경애누나.
항상 유쾌하지만, 속마음도 깊은.
오늘 자기 등반 잘하는거 보고 놀라지 말라며, 적막을 웃음소리로 채운다.
야등은 생각도 두려움도 없애 준다.
고도를 어둠으로 감춰주고, 헤드랜턴 불빛이 보이는 곳에만 집중하면 되기에
여느 등반보다 집중도가 높다.
자일 1동으로 4명이 등반을 하지만
다들 자기일을 찾아 마음을 맞추다 보니 진행도 거침이 없다.
두번째 전더미지만 처음인 1~3피치
오랜만에 만난 슬랩에 발에 대한 믿음이 밤처럼 어둑어둑하다.
this way
어둠 속 헤드랜턴의 빛이 주인공에 비춘 핀 조명 같다.
각각의 등반에 스스로가 주인공임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멀티피치 등반은 팀경기다.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한 사람 한사람 자기 역할을 다할 때
우리는 각각의 점이 아닌 선으로
길을 이을 수 있다.
5피치.
오랜동안 운동 안하고 (지금도 안하지만) 처음 붙었을 때 꽤나 헤맸었는데, 지금 해보니 왜 그랬나 싶다.
나는 가끔씩 생각없이 등반하고, 자주 멍때리고 등반을 한다.
선등자가 6p 를 마치고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그리고 기분좋은 등반에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마지막으로 내가 등반을 하니 위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등반코칭을 해준다.
"레이백 레이백!"
이제 하강이다.
한명씩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니 어둠속에서도 산그리메가 뚜렷하다.
아래에서 치고 오르는 바람이 제법 시원해
"이 좋은 걸 나두고 아둥바둥 사는구나" 싶다.
많이 와 봐선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잘 찾는다.
앞선 사람의 빛을 따라가다보니 산 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을 불빛 위로 팀원들의 모습이
그럴싸한 원정 대원 같다.
쉬워도 안전하게 줄을 깔고 하강.
어둠 속에 두사람이 아무말 없이 각자의 하강을 준비하는 모습에
진지함이 묻어나온다.
그렇게 모든 하강을 마치고 다시 사람을 길로 내려오니 경애 누나 말처럼 며칠 이른 보름달이 우리를 반긴다.
오랜만에 텐트를 치고
경애 누나의 세간살이에 달래의 살림을 보태어 무대를 만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적당한 여름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가벼운
그렇게 짧은 밤을 보내고
이른 새벽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내가 잊고 있던, 아니 내가 그리워 하던
기분 좋은 등반이였다.
2022년 어둠이 좋던 날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빛이였다.
'하고있는 > 홍산악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SH-PRJ] 2회차 - 지리산 화대종주 (0) | 2022.10.04 |
---|---|
[SH-PRJ] 1회차 - 월출산 사자봉릿지 (0) | 2022.09.26 |
프로젝트 등반 (0) | 2022.09.20 |
추억은 방울방울, 금정산 무명릿지 야등 (0) | 2022.08.01 |
깊은 밤, 깊은 산, 얕은 마음 - 우리산 와룡산 상사바위 야등 (0) | 2022.07.26 |